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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랑니가 나기 시작한 나는

freijin 2022. 10. 30. 03:33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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며칠 전부터 오른쪽 아래 어금니 뒤 편 잇몸이 시리고 욱신거리기 시작했다. 침을 삼킬 때도 아프고 밥을 먹을 때도 미간 사이 주름이 쭈그러들었다 펴질 정도로 잇몸이 퉁퉁 붓고 아팠다. 사랑니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. 몇 년 전 학생일 때 치과에 가서 찍었던 엑스레이에서는 4개의 사랑니가 잇몸 아래에 꽁꽁 몸을 뉘어 숨어 자고 있었는데 그놈 중 제일 큰 사랑니가 잠에서 깨 20살을 마무리하는 겨울에 자라기 시작하는 중이다.

사랑니는 어른이 될 때 그리고 사랑할 때 난다고 하던데 나는 어른일까 사랑 중일까.
퉁퉁 부은 잇몸을 보고 사랑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. 그럼 너는 정말로 사랑 중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 특유의 왼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머쓱함에 내 뒷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아마 맞다고 대답할 것 같다.

경주 고양이, 하늘



나는 엄마가 자기 전에 내 등을 토닥이는 것도 사랑하고 우리 집 고양이들이 졸졸히 모여 와득거리며 사료를 먹는 것도 사랑하고 매 계절 다른 모습으로 떠 있는 구름들도 사랑하고 여름에 지는 주황색 노을도 사랑하고 침대맡에 쌓여 있는 눈물 나는 시집들도 사랑하고 배부르다면서 밥 먹고 마시는 커피랑 케이크도 사랑하고 겨울이 언제 오나 하염없이 기다렸다가 겨울이 오면 후다닥 꺼내 입는 검은 코트도 사랑하고 윤슬에 빛나는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모습도 사랑한다. 나는 항상 부족함이 없는 사랑을 해왔다. 내 인생에 사랑이 없는 날들은 없었다.

그런데 나는 왜 20살 겨울 이제야 사랑니가 날까. 그것은 내 머쓱한 웃음의 이유인 새로 시작한 사랑에 있다. ‘새로 시작한 사랑’ 말이 우습다. 새롭게 시작했다는 것도 우습고 사랑을 마음먹고 시작했다는 것도 우습다. 제일 우스운 단어는 ‘사랑’이다. 나는 분명히 많은 것을 사랑한다. 또 새로 사랑하기 시작한 그 사람을 제법 많이 사랑한다. 그래도 사랑은 우습고 쑥스럽다. 사랑은 어린아이 때 사탕이 먹고 싶은데 엄마한테 차마 먹고 싶다고 말 못 하고 딴청 피우며 “사탕 맛있겠다….”하면 내 조마조마한 작은 마음을 엄마가 알고 사탕을 내 손에 쥐여주셨을 때 느끼던 머쓱하지만, 또 기쁜 그런 내 조그만 어린 마음 같다. 내 세포 하나하나에 마음들이 가득 차 있는데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는 꽁꽁 숨겨야 하는 그런 마음들 같다.

사랑은 어렵다. 지난날에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.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입에서 나올 어떤 말을 기대하는 그에게 나는 잘 모르겠다며 말을 돌렸다. 그리고 나는 집에 가는 버스에서 그리고 잠들기 전 침대에서 또 다음 날 학교에서 계속 생각했다. 나는 그를 사랑하나. 그 사람이 없어도 살 수 있고 혼자서 먹는 밥도 맛있고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그 사람 생각이 거의 나지 않았다. 또 나는 그에게 무엇을 받았고 나는 또 무엇을 주었는가 더하기와 빼기로 이루어진 연애를 했었다. 타는 목마름에 급하게 마신 콜라 같은 연애였고 갈증에 더 타들어 가는 사랑만 빠진 연애를 나는 했었다. 나는 그렇게 사랑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사랑의 어려움에 머리가 지끈거려 마음속에 꾹 눌러 잠을 자게 했다. 그때부터 사랑니가 자고 있었나 보다.

노을 밤 하늘


그래서 지금은 사랑니가 나기 시작하나 보다. 어렵고 무서운 사랑인데 지금은 쑥스럽고 우습다. 지금은 사랑의 마음이 자꾸 찾아온다. 함께 걸어가며 꽉 잡은 두 손을 볼 때, 어두운 밤에 이불을 다시 덮어줄 때, 마음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, 내 우울에 놀람보다는 포옹으로 답을 해줄 때 나는 사랑이 찾아오는 것을 느낀다. 처음 이런 무서운 사랑을 느껴봐서 요즘은 마음이 많이 움직인다. 가을날에 세상에서 제일 크게 웃을 때는 마음이 둥둥 떠다니고 나를 떠나갈 것 같은 날에는 두려움에 마음이 텅 비어버린다. 하루에도 여러 번 마음이 움직이면서 마음의 근육이 생기나 보다. 이렇게 마음의 근육이 생기다 마음이 튼튼한 사람이 되면 그때는 어른이 될까? 아니 그것보단 마음이 자꾸 쿵쿵 움직여서 세포와 신경들이 다 잠에서 깨서 자고 있던 사랑니도 깼나?

자라나는 사랑니에 쓰린 잇몸을 보고 사랑을 떠올리는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. 늘 무서운 치과에 가서 사랑니를 뽑고 추운 20살을 보내고 계속 사랑을 하다 보면 어른이 될까. 처음 해보는 사랑에 서툴렀고 사랑을 한 지 몇 달째 이제 일상에 깊이 녹아들어 간 때에 알림이 울리 듯 사랑니가 자라기 시작한 것이 신기하다. 아직 잇몸이 아프다. 오늘 밤에도 볼을 어루만지며 내일은 치과에 꼭 가야지 하며 잠에 든다.

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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